농민신문

　외할머니 집 부엌에는 세개의 지사(질) 항아리가 있었다. 먹기와 색을 지닌 지사 항아리는 옹기 항아리와 달리 실내에서 사용되는 항아리였다. 키보다 큰 지사 항아리를 보며 어린 나는 가끔 항아리 안이 궁금했다. “뭐가 들어 있어?” 할머니에게 물으면 할머니는 “우리 강아지 밥이 들어 있지”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지사 항아리를 행주로 닦았다. 부엌문을 열면 어두컴컴한 부엌에 나란히 선 항아리들의 둥근 배가 보였다. 내 키가 항아리와 비슷해졌을 때 벽돌을 딛고 올라 항아리 안을 보았다. 세개의 항아리 안에는 모두 쌀이 들어 있었다.

　사실 나는 세개의 항아리 안에 모두 쌀이 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외가는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직후였고 외가 식구들은 매일 보리밥을 먹었다. 보리밥을 지을 때는 가마솥에 보리를 두번 삶아야 했다. 애벌로 삶은 보리를 대나무 소쿠리에 넣어 두었다가 식사시간에 맞춰 한번 더 가마솥에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두번 삶으면 보리알이 크게 부풀었고 소화하기도 쉬웠다. 제대로 삶은 보리밥을 먹지 못하면 종일 방귀가 나왔다.

　할머니는 밥을 지을 때 애벌보리가 자리한 가마솥 한쪽에 한줌 정도의 흰쌀을 놓았다. 밥을 풀 때 할머니는 흰쌀과 보리를 반반 섞어 따로 그릇에 담았는데, 이 밥이 할아버지와 나의 밥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풍년이 들면 흰밥을 먹게 해주마.”

　보리밥 위에 흰쌀이 슬쩍 지나간 그 밥을 나는 잘 먹었는데 밥에 보리가 뭉쳐 내가 잘못 먹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참기름 몇방울을 밥에 떨구고 간장과 함께 비벼주었다.

　어느 날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항아리에 쌀이 많은데 왜 보리밥만 먹어요?” “아이고 내 새끼, 내일은 쌀밥 해주마.” 다음날 아침 밥상 위에 두그릇의 쌀밥이 올랐다. 사기그릇에 담긴 쌀밥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밥을 아주 잘 먹었는데 감자를 넣은 된장국의 맛도 꿀맛이었다. 그날 할머니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시집왔을 때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단다. 자식은 많지(열둘을 낳았다),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구나.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지. 둘이나 세상을 떠나보냈구나. 병약해 떠난 것이지만 잘 먹였다면 떠나지 않았을 수 있었지. 할아버지와 나는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죽도록 일을 했구나. 쌀을 모으고 또 모았단다. 부엌에 있는 지사 항아리는 그때부터 우리 집에 있었구나. 너무나 귀한 쌀이기에 지사 항아리에 담았단다. 공출이 심해 일본 순사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지. 그때 우리는 쌀 항아리를 땅에 숨겼단다. 저 항아리들이 바로 그 항아리들이지. 할미가 살다보니 삼년 넘는 흉년은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 아끼고 아껴 보리와 바꿔 먹으면 항아리 하나로 한해를 넘길 수 있었지.”

　할머니에게 지사 항아리 하나는 일 년 분의 양식인 셈이었다. 어떤 흉년이 오더라도 할머니의 집에서는 곡기가 끊겨 세상 떠나는 목숨이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할머니가 가신 뒤 항아리들의 운명도 바뀌었다. 쌀이 풍족해져 보리와 바꿔 먹을 일도 없어졌다. 매일 챙겨주는 이가 없으니 항아리들은 조금씩 금이 갔고 외가가 댐 공사로 수몰된 뒤 그 모습은 사라졌다.

　가끔씩 지사 항아리 안의 쌀을 들여다보던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먹물 빛 독 안에 든 흰쌀.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르지만 하얀 옷을 즐겨 입어서만이 아니라 ‘하얀 쌀밥을 꿈으로 여겼던 착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내게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할머니의 하얀 쌀밥과 감자된장국 생각이 난다.

　●시인 곽재구는…

　시인 곽재구는 195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사평역에서> <서울 세노야> <와온 바다> 등의 시집과 <곽재구의 포구기행> 및 인도기행 <시간의 뺨에 떨어진 눈물>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