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시 : 2017년 08월 30일
요즘엔 바로 이웃 약산도까지 연륙교가 이어져 가장 가까운 포구까지는 쾌속선으로 30~40분이면 가 닿는다. 하지만 예전엔 매일 한차례뿐인 연락선으로 육지까지 두어시간씩 걸리는 낙도였다.
섬 지역은 으레 지형 특성상 식수와 논이 귀하다. 우리 마을 역시 단 하나의 공동우물로 수십가구가 먹고 살았다. 순전히 밭농사뿐이어서 잡곡과 고구마는 흔했지만 쌀은 육지에서 사다 먹어야 하는 값비싼 양곡이었다. 그럼에도 완도 지방은 오히려 웬만한 육지 농촌보다 살림이 더 넉넉한 편이었다. 예로부터 특산물로 유명했던 김·멸치·미역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의 유년은 늘 허기지고 외로웠다. 직장 때문에 부모님과 형제들은 육지에서 지냈고, 나는 세살 때부터 열살 때까지 섬의 조부모 밑에 따로 남겨졌던 것이다. 육친의 정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그 유년기의 공백은 평생 내게 그림자로 남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절절한 외로움과 허기를 채워준 것은 고향의 풍요로운 자연과 사람들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은 참으로 다채로운 풍경과 색채, 소리와 냄새, 촉감과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비탈진 산기슭에 올라앉은 초가삼간 우리 집. 여름이면 찔레꽃 피어난 돌담장 너머로 빤히 내려다뵈는 앞바다. 마당 양쪽으로 꼬막 껍데기마냥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 초가집들. 쇠똥이 어지러이 널린 구불구불한 고샅길. 잔잔할 때는 수면에 온통 은비늘을 깔고 호수처럼 고요히 반짝이다가도, 삽시간에 무시무시한 폭풍우와 함께 엄청난 기세로 소용돌이치는 바다. 아침마다 동쪽 섬들과 바다 사이로 불쑥 솟아오르던 태양. 잠자리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온갖 소리와 기척들. 모래 기슭을 차박차박 핥아대는 파도 소리, 부엉이 울음, 뒤란 대밭과 솔가지를 우우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뿐이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우리 섬에선 밤이면 호롱불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마저도 비싼 기름을 아끼려고 저녁밥을 먹을 때만 잠시 켰다. 해가 지면 세상은 온통 깜깜한 어둠으로 변하고, 바야흐로 별과 달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마당에 평상을 내놓고 모깃불을 모락모락 피워놓으면 모든 준비 끝.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아, 그 광활한 암흑 천공에 가득히 솟아나와 깜빡이던 찬란한 별들의 은하. 그 거대한 빛 무더기가 금세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곤 했었다.
우리 마을은 ‘쥐구멍’이라 불릴 만치 외진 곳이었다. 먼 거리를 걸어다녀야 하는 자식들을 위해 마을 어른들이 십시일반으로 건축기금을 모아 분교를 세웠다. 교실 한칸, 교사는 한분, 입학은 격년제였다. 스무명 남짓한 전교생은 물론 한동네 아이들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각기 소를 몰고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소들이 풀을 뜯는 동안 무덤가 풀밭에 모여 씨름을 하고, 쥐불을 피워 집에서 훔쳐온 콩이며 보리를 볶아 먹던 아이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지금은 행정구역상 금일읍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평일도는 여전히 섬이다. 그동안 완도군의 많은 섬들에도 더러 웅장한 다리가 놓였다. 육지와 연결된 다리도 있고, 이웃한 섬끼리 이어진 다리도 있다. 하지만 다리가 놓인다고 섬이 진짜로 육지가 되랴. 완도는 여전히 섬이다. 사방이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섬, 세상 어디보다 넓은 수평선과 하늘을 가진 섬, 무한한 우주를 이마 위에 얹은 채 수억만 년의 시간을 도도히 지켜온 섬. 그 아름다운 섬들에는 여전히 순박한 웃음을 간직한 낯익은 내 고향 사람들이 산다.
누가 고향을 물으면 나는 ‘완도’라는 대답에다가 한마디를 꼭 덧붙인다. “전 섬사람입니다.” 물론 그 엉뚱한 한마디에 담긴 나만의 특별한 긍지와 애정을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쩌겠는가. 바다는 영원한 자유이고 생명이다. 섬은 바다의 꿈이다. 그리고 난 그 섬의 아들인 것을.
▶임철우는
1954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아버지의 땅> <그리운 남쪽> <봄날>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별하는 골짜기> 등이 있다. 고향인 평일도를 배경으로 6·25전쟁과 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적인 사건들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이상문학상·단재상·요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