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시 : 2017년 08월 30일
<태양의 후예>는 멜로의 대가라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게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는 군인 유시진과 의료봉사를 떠난 의사 강모연이 우르크라는 위험한 분쟁지구에서 긴장감 넘치는 사랑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우르크라는 가상의 공간은 이들을 그냥 놔두질 않는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준전시 상황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질 않나,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발전시설 건설현장이 몽땅 무너지질 않나 심지어 전염병까지 창궐한다. 하지만 유시진과 강모연의 사랑이 더 애틋해지는 건 이 전쟁과 재난 속에 이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파병된 군인이 등장하지만 드라마에서 군인들의 국적은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드라마의 배경이 우르크(가상공간)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있는 공간보다 중요한 건 오히려 사랑이나 휴머니즘과 관련한 사건들이다. 군인이 등장하고 때로는 태극기가 게양되며 거기에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이 들어간다고 ‘국가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사실상 국적 개념이 살짝 지워져 있다. 이런 무국적성은 <태양의 후예>가 32개국에 수출되는 글로벌 콘텐츠가 된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태양의 후예>가 다른 지상파에서 고심하다 결국은 편성이 무산되고 KBS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용은 멜로지만 규모는 블록버스터급’이었기 때문이다. 무려 130억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블록버스터 드라마 대부분이 이런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시작하기도 전에 망가진다. 일반적인 드라마 제작방식, 이를테면 방송사가 일정 부분 제작비를 대고 제작사의 투자와 간접광고로 나머지 제작비를 충당하는 식으로는 이 정도의 제작규모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KBS는 새로운 제작방식을 시도했다. 영화제작사인 NEW(뉴)가 참여해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사전 제작해 한·중 동시 방영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지상파 드라마들은 지금까지의 관행을 따라 적당한 규모로 괜찮은 시청률을 내는 드라마를 만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두 부류의 드라마가 등장했다. 하나는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과거 우리네 드라마의 문법을 어느 정도 가져가는 이른바 ‘복합장르’라는 퓨전 콘텐츠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파의 고령화된 시청자 눈높이에 맞춰 자극적인 내용으로 전개되는 ‘막장드라마’다. 하지만 이 두 부류의 드라마들 모두 장르의 완성도를 어느 정도 무너뜨리면서 만들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시청률 역시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보다 많은 투자를 통해 완성도를 추구하자니 시청률이 안 나오고, 그렇다고 시청률을 위해 완성도를 포기하자니 시청자의 이탈이 가속된다.
<태양의 후예> 같은 글로벌 콘텐츠를 지향하는 새로운 제작방식과 그 덕분에 탄생한 글로벌한 정서를 담은 드라마는 그래서 갈림길에 서 있는 지상파 드라마에 새로운 대안으로 다가온다. 어차피 이제는 중국이라는 시장을 외면할 수 없고, 이를 통해 글로벌 콘텐츠를 지향해야 한다면 <태양의 후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콘텐츠의 규모는 콘텐츠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규모가 커지는 게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규모의 확대와 함께 움츠러들었던 상상의 폭이 넓어진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달콤한 멜로가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