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시 : 2017년 08월 30일
하우스 안에서 마이크를 타고 흐르는 선생의 느리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는 마치 시 낭송처럼 부드럽게 퍼져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청중은 나처럼 농사짓는 후배 작가, 선생이 교직에 있을 때 수업을 듣던 제자, 그리고 선생의 독자들이었다. 아빠를 따라온 중학생도 있었다.
얼마 전 지자체와 지역도시농부단체의 후원을 받아 농장에서 진행한 ‘저녁이 있는 작가와의 대화’의 첫 순서로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모셨다. 선생은 자신의 작품이나 작가로서의 고뇌 등을 풀어내는 대신 당신의 고향 바다와 우리 안에 내재한 본성으로서의 자연을 불러내셨다.
“우리는 사람의 자식이자 책의 자식, 그리고 대지의 자식이지요. 맞지요?”
선생은 미소 띤 얼굴로 자분자분 말씀하시는데 듣는 이들은 숨소리를 죽이며 깊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입구 쪽에 서 있던 내 눈에 교복 차림의 여중생 한명이 띄었다. 비록 뒷모습이긴 했으나 신통하게도 그 아이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선생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농장에 꽃 한송이가 핀 것만 같았다.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저녁도 함께했다. 저녁거리는 낮에 미리 동료들과 준비해두었는데 밥과 닭볶음탕, 그리고 냉이무침 같은 것들을 내놓았다. 서툰 솜씨로 만들었음에도 선생을 비롯해 다들 맛있다고 해주니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무언가로 맺음을 해야 한다면 그건 역시 밥을 나누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농장에서 농사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끝에 도시농부들이 힘을 모아 운영하는 농장에서는 시농제나 씨앗나눔 같은 행사들을 한다. 또 일부 농장은 목공실이나 흙 빚는 공방을 만들어 농사 외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작년 가을엔 텃밭과 인문학을 연결한 프로그램을 실행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고양시의 한 농장에서는 2주에 한번씩 농장의 허름한 비닐하우스에서 인문학 강의를 열고 있다. 참석자들이 십시일반 모아 강사에게 교통비 정도를 드리고 밥과 술을 나눈다.
올해는 500평 남짓한 새 농장을 얻었다. 튼실한 하우스도 있어 책상과 의자를 들여놨다. 내친김에 오디오 시설도 갖춰놓았다. 한여름 주말 저녁엔 음악회도 열어볼까. 나를 포함한 소설가 둘, 청소년도서관을 운영하는 인문학 강사,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선배까지 넷이서 운영해갈 농장이다.
지난가을 텃밭인문학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이번 행사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너무도 고맙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두달 뒤엔 젊은 요리사가 온단다. 음식도 잘 만들고 책도 몇권 썼다는데, 요리뿐 아니라 원재료에까지 상념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란다. 벌써 그날이 기다려진다.
정화진(도시농부·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