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시 : 2017년 08월 30일
한 사람과의 만남이, 때로는 한 지역과의 만남이 우리의 일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그래서 이웃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현재의 내 모습이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양귀자(1955년~)도 다르지 않았다. 전북 전주 태생인 그녀는 고향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그녀가 경기 부천시 원미동으로 이주한 것은 1980년대 초반. 결혼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상경했지만 눈만 뜨면 치솟는 집값에 마음 편히 살 집조차 구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집을 비워주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고, 급한 마음에 어느 날 문득 전철을 타고 정처 없이 내달리다가 형편과 비교적 맞는 것 같아서 살게 된 곳이 원미동이었다.
이곳에서 양귀자는 다양한 이웃들의 삶과 마주한다. 1980년대 초반 원미동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의 집합소였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연탄 배달도 하고 날품팔이도 하고 공장에도 다니고 넥타이를 매고 서울로 출근도 했으며, 장사를 해서 먹고 살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밭에 인분을 뿌려가며 농사를 짓는 토박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눈에 그들 모두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외로운 영혼들이었다. 작가는 원미동 사람들에게서 동병상련의 애잔한 향수를 느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이웃이 되었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시작이다. 원미동의 이름 없는 이웃들이 무명의 소설가 양귀자를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로 만들어준 셈이다.
“아직도 유사장 마음은 이 땅에 있는 모양이니께 금액이야 영감님 마음에 맞게 잘 조정해보기로 하고, 일단 결정해뿌리시요!”
땅값 따위에는 관계없이 땅을 팔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을 누차 했건만 박씨의 말뽄새는 언제나 저 모양이다. 서울것들이란. 박씨 내외가 복덕방 안으로 들어가버린 뒤에야 그는 한마디 내뱉는다. 저들 내외가 원래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강노인에게 있어 원미동 사람들은 어쨌거나 모두 서울 끄나풀들이었다.
-<원미동 사람들> 중에서
점점 더 이웃이 낯설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농촌도 다르지 않다. 귀농과 귀촌 인구는 해마다 늘어난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깊어지는 갈등의 골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 사람들은 ‘텃세’를 들먹이고, 한평생 고향땅을 목숨처럼 지켜온 이들은 ‘굴러온 돌’을 들먹인다. 길 한뼘, 담장 한줄에 고성이 오가고 미움은 나이든 마음에서 살의를 일으켜 종종 말도 안되는 참혹한 사건이 온 마을을 뒤덮고, 이 사회를 경악에 빠뜨린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각박함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 아버지의 자애로운 기다림으로 기억되는 농촌마저 검게 물들이고 있다. 이것이 문제임을 느끼고 지적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문제를 몸소 겪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고달프다.
우리네 보잘것없는 인생들에게 세계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지구를 뜻하는 바가 아니다. 내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작은 울타리다. 그 울타리 안쪽에 사랑하는 식구들이 살아간다. 그 울타리 안쪽에서 이웃의 삶이 진행된다.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희망과 절망, 폭력과 소외, 갈등과 이해가 교차한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작은 오해로 개인들의 삶이 부스러지기도 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큰 법이며, 그런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비로소 이해와 희망이 확장돼 나와 다르지 않은 우리를 내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처음부터 좋은 이웃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