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시 : 2017년 08월 30일
<시그널>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무전기’라는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현재의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와 과거의 형사가 미제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드라마다. 그 흔한 애정관계도 없고 오롯이 범죄를 쫓는 형사들의 절박한 이야기다. 촘촘한 구성에 박진감 넘치는 전개, 웬만한 영화 뺨치는 섬세한 연출은 <시그널>을 완성도 높은 미국 드라마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토록 눈길 가는 작품이 왜 지상파 방송사를 통해 방영되지 못했을까. 훨씬 더 많은 대중이 접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실 <시그널>은 지상파에서 먼저 제작이 논의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방송사가 제작을 거부했다. 특히 SBS는 그동안 <시그널>을 집필한 김은희 작가와 여러차례 작업한 방송사인데 이번 장르물(스릴러·추리 등 특정 장르적 속성이 두드러지는 드라마)에는 부담을 느꼈던 듯하다. 지난해 <용팔이>가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장르물들이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과 같은 그림은 재작년 열풍이 불었던 드라마 <미생> 때도 똑같이 벌어졌다. 당시에도 <미생>은 지상파에서 먼저 검토했지만 멜로(선정적이고 감상적인 연애담)의 부재로 편성에서 제외됐다. 그럼에도 tvN에서 방영된 <미생>은 높은 완성도로 시청률 8%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지상파가 이들 드라마를 거부한 이유는 분명하다. 본격 장르물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렵다는 현실 때문이다. 지상파의 본방을 사수하는 고정적인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드라마 속에 녹아 있었으면 하는 코드가 있다. 멜로나 가족 코드가 그것이다. 지상파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즉 기존의 시청자층을 거둬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더라도 그 완성도를 훼손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반면 어차피 플랫폼 우위에서 뒤처지는 tvN 같은 케이블 채널은 영화 인력까지 드라마에 끌어들이는 등 오히려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지상파의 시청층이 점점 고령화되는 반면, 지상파에서 이탈한 케이블 채널 시청층은 훨씬 더 젊고 완성도 높은 본격 장르물을 즐기고 싶어 한다. 게다가 <미생>이나 <시그널>이 이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건 이제 케이블 시청층 또한 꽤 두터워지고 있다는 의미다.
지상파들은 이러한 변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 지상파든 비지상파든 접근이 쉬운 쪽이 아닌 콘텐츠가 좋은 쪽으로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는 정서가 시청자들 사이에서 생겨나기 시작해서다. 그러니 갈수록 지상파니 비지상파니 하는 경계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대신 어떤 좋은 프로그램이 거기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시대적 변화에 위기를 맞은 지상파는 생존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더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취해 있지만 말고 어떻게 하면 콘텐츠 우위에 설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시그널>의 성공이 지금 지상파에 보내는 신호가 바로 그것이다.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