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신문

　설이 다가온다. 명절 때나 가족행사를 위해 시댁을 찾을 때면 나는 항상 필수적으로 2개의 물건을 챙긴다. 바로 앞치마와 고무장갑이다. 이것만 있으면 마치 삼손이 된 것처럼 거침없이 일한다. 그러고 보면 시댁에 도착해서 나오는 순간까지 부엌에만 있다가 오는 편이다. 시댁에 가면 나는 더 이상 박사도, 전문가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며느리들처럼 단지 일꾼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부엌에서 나누는 동서들과의 유쾌한 대화는 시댁과의 유대감을 느끼게 하고 또 충분히 즐겁다.

　가족연구들을 보면 며느리는 단지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의 재생산과 가족경제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며느리는 가족을 지키는 수양자식이나 다름없다. 며느리를 맞이하는 가족은 노부모 봉양, 가사일, 그리고 아들의 시중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줄 새로운 일꾼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가족패턴이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그토록 가족을 위해 일하는 며느리에게 호의적이지도 않다. 아들을 빼앗아간 여자라는 생각에 미워하기까지 한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연구를 보면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의 사산 위험은 상대적으로 34%나 높았다. 이러한 결과는 특히 친정어머니가 없는 젊은 부인에게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임신 중 고부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머니가 아들의 배우자와 자주 다투고 친손주보다는 외손주에 더 힘을 쏟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가 자신의 아들을 빼다박은 듯한 손주를 낳지 않는 한, 무의식중에 며느리의 아이가 자신의 손주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며느리가 낳은 자식은 외손주만큼 예쁘지가 않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조부모로서는 친손주보다 외손주가 유전적 친족관계가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친정어머니와 가까이 사는 어머니한테 태어나 보살핌을 받는 자녀들이 시어머니와 가까이 사는 어머니의 자녀들보다 생존율이 더 높았다는 연구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볼 수 있는 고부갈등의 이면에는 아들의 혼외를 통한 자손 번식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깔려있다. 많은 진화심리학적 연구자들은 아들을 통해서는 더 많은 자녀를 갖고 싶은 욕구, 딸을 통해서는 자신의 혈육을 잘 키우려는 욕구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 비해 며느리는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또 다른 독특한 위치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일꾼의 역할을 할 뿐이다. 며느리에 대한 ‘진화론적으로 뿌리박힌 불신’과 고부갈등은 동서양은 물론 시대불변의 가족 모습이기도 하다.

　명절이 되면 무수한 며느리들은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일꾼 역할을 하러 시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시어머니에게 아들은 주인이고 뒤늦게 오는 딸은 또 다른 반가운 손님이지만, 처음부터 와 있는 며느리는 시종일관 부엌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력 제공자이다. 이에 불편감을 느끼는 며느리들은 명절이 반갑지가 않다.

　위에 언급한 심리학 연구들이 가족관계 갈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며느리도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또 그 상처는 갈등의 증폭제 역할을 할 방어기제를 만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한국가족상담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