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시 : 2017년 08월 30일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 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 수필 <인연> 중에서
피천득(1910~2007)의 ‘금아(琴兒)’라는 호는 춘원 이광수가 지어 주었다. 그는 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살에 어머니마저 잃은 천애고아로 자랐다. 그런데도 문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도통 세상이라는 곳을 미워할 줄 모르는 이 선한 성품에 감동하여 ‘금아’라는, 풀이하자면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소년’으로 영원히 살아가 달라는 소망을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이광수의 당부대로 피천득의 생애와 문학은 우리에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찾아가 위로받을 수 있는 어린 날의 외갓집처럼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의 글과 삶의 순간들이 그를 읽고 아는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인연이 되어주는 까닭이다.
1996년 여든한편의 글들을 모아 발표한 수필집 제목으로 <인연>이라는 말을 정해놓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본 유학시절 신세진 하숙집 딸내미와의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 20년 넘는 세월에 걸쳐 이어지는 풍경을 담백하게 떠올린 같은 제목의 수필 <인연>에서 피천득이 그리워하며 못내 아쉬워하는 아사코와의 추억은 우리들 각자가 잃어버린 순수함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나를 꾸며내지 않고 진솔하게 세상을 대할 줄 알았던 소박한 인연들이 어느덧 물질 앞에서 속셈을 의심하게 되고, 한줌도 되지 않는 명예를 위해 비굴해지고 때로는 거만해진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들이 훗날 변질되어 상처가 되고 후회로 남는 것은 우리가 더는 그때의 소년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인연이란 주고받음이므로 변해버린 내가 변해버린 남을 나무라고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변해버린 나를 깨닫는다. 그리고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순수하고 자연스러웠던 한때로 돌아가곤 한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수필 <인연> 중에서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피천득은 원래 영문학자다.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지내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섬세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며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유명 작가로 평생을 살았으나 세상을 떠나기까지 오래된 작은 아파트 1층에서 수십년을 검소하고 소탈하게 생활했다. 그 집을 찾는 이에겐 이름도 묻지 않고 두말없이 값싼 녹차부터 대접했으며, 서재는 피천득이라는 이름이 초라해 보일 만큼 소박했다. 책도 인연이라 분에 넘치게 소장하면 소홀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작가의 명성에 기대어 오라는 곳도 많았지만 어딘가에 속한다는 것은 그곳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 상처가 된다며 사람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공적인 자리를 모두 마다하는 강단이 있었다. ‘금아’라는 이름이, 그 소중한 인연들이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글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 생명력이 느껴지는 원동력은 누구나 입에 담는 소박한 언어로 섬세한 일상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긴 여운이 남는 까닭은 작가의 소년 같은 진솔한 마음이 계산된 만남에 쫓겨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안식을 건네기 때문이다.
글 한편에 담긴 맑은 언어가 가슴을 울리며 잃어버린 인연을 대신해주는 것…. 아마도 피천득이 생전에 소망했던 가장 큰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